보물함

[스크랩] 야사 - 公主의 男子

청산노을 2012. 11. 21. 22:37

 

 

 

公主의 男子

野史 錦溪筆談에서

조선 초였던 조선 6대 왕 단종초기. 호랑이 같았다던 수양대군이 친조카

였던 단종을 몰아내고 왕이되었는데-(형님인 문종은 공부 너무 좋아해서

허약. 이점 세종도 공부벌레였다. 문종의 아들 단종을 저 멀리 강원도

영월로 유배시키려 할 때 이의 옳지 못함을 직간하였던 사람들은 김종서외

에도 사육신, 생육신이라던가 세종의 셋째아들인 조선 명필 안평대군이라든

가 역시 세종대왕의 아들로 영민했던 금성대군. 아무튼 세종대왕은 너무 똑

똑한 아들이 많았다. 특히 둔갑술에도 능했다던 금성대군이 단종복위운동을

하는 바람에 함께 동조했던 경북사림파가 대거 축출된다.

 

그러다보니 후궁이던 신빈김씨 소생인 13째 아들 밀성군 자손이 전주이씨

명문가를 이루었다.단종을 저 멀리 강원도 영월로 유배시키려 할때 이의

옳지 못함을 직간하며 단종 복위를 꿈꾸었던 충신들은 수없이 죽어 나갔다.

그 중에는 수양대군의 딸로서 충간했던 첫째 딸도 그 중의 한사람이었다.

공주는 부왕이 된 수양대군에게 이제 겨우 12살짜리 단종을 영월로 유배하

는 것을 왕가의 패도라 왕좌를 보존시킴이 하늘이 바라는 순리라 직간하였

다. 그러자 세조는 -아무리 딸이라하더라도 크게 대노하여 한낱 아녀자인

공주가 주제넘게 국사에 관여하여 도리어 일을 그르친다하여 자기 딸을

죽이려고 하였다. 왕비(정희왕후)는 딸의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다는 것을

깨닫고 남의 이목을 피하여 노비와 함께 많은 금자를 내주어 야반에 도주

케 하며 이르기를 “공주는 이제 왕실의 자손이 아니니, 어느 곳에 가서

살던지 신분을 감추고 평민이 되어 부디 몸조심하며 편히 잘살아라”하였다.

 

( 다른 이조 야사집에는 유모와 함께로 되어 있다) 아무튼 공주는 눈물로

하직하고 도성성문을 겨우 빠져 나오니 그저 앞날이 암담할 뿐으로 달리

아무런 묘책이 없었다.

 

부평초처럼 이리저리 떠돌던 공주가 송림이 울창한 심산유곡인 지금의

옥양동에 이르자 마침내 해는 저물어 숙소를 찾게 되었다. 마침 멀리 불빛을

발견하고 반가운 마음으로 다가가 보니 보굴암 입구의 초막에서 나온 불빛

이었다. 거기서 하룻밤만 유하려고 주인을 찾으니 초막에서 나온 주인이 엄두

리 총각이라 공주는 차마 아무 말도 못하고 머뭇거리다가 겨우 어렵사리 그간

여러 날의 노독을 이야기 하였다. 총각도 처음에는 낯선 규수의 유숙을 거절

하다가 너무 딱한 공주의 사정을 듣고서는 자기 방을 비워 주었다. 공주는 총

각이 부엌에서 잠을 자겠다는 소리에 그 총각의 인물됨과 여러 행동거지에서

범상치 않음을 직감하였다. 그렇게 며칠을 보내던 중 노비와 의논하여 총각과

평생가약을 결심하게 되었다. 며칠 뒤 공주는 그 총각에게 피차 팔자가 기박한

사람끼리 이왕에 이렇게 만났으니 성혼하여 부부가 됨이 어떠하냐고 의중을

물었다. 총각 역시 그간의 공주의 언행이 범상치 않음을 알고, 마음을 허락하

였다. 이렇게 하여 서로 신분을 속이고 평민이 된 공주는 보굴암 밑 초막에서

살게 되었다.

 

세월이 흘렀다. 그리하여 그들 사이에 마침내 장남이 태어나게 되었다. 공주는

농밑 깊숙이 넣어 두었던 금자를 꺼내 놓으며 남편에게 자신의 신분과 그동안

감춰야만 했던 긴 내력을 이야기하게 되었다. 그러자 공주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남편이 길게 탄식하며 “원수의 자식을 다리 위에서 만나 자식까지 낳았

으니 이 일을 어찌하리오” 하며 탄식하였다. 그가 바로 수양대군에게 철퇴를

맞아 죽은 문종과 단종 때의 충신 김종서의 친손자였던 것이다. 계유정난의

피비린내 나는 환란 당시 노비들의 도움으로 구사일생으로 자기 혼자만 구명도

생하여 집을 빠져나와 이 심산궁곡에서 은신 중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자신의

신분을 숨기며 은신하여 살던 그 부부는 가진 돈을 생자로 하여 보은 내속리면

사내리로 이사하여 수년을 살던 중 마침 세조(수양대군을 말함)께서 득병하여

(단종의 어머니가 꿈에 나와 침을 뱉었는데 거곳에서 득병했음)

 

그 행차가 그 병에 유명하다던 속리산 어느 곳에 요양차 입산하였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들은 길목을 지키고 있다가, 며칠 후 세조의 행차가 지나감을 보고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통곡하였다. 여기서 잠깐,  다른 야사집에는 분명히

공주의 딸이었다. 왕인 세조의 행차가 지나가는 곳에 우연히 길가의

수많은 사람 중에 어린 여자아이를 보았는데 그 모습을 본 세조가 지난날의

딸이었던 공주의 남자드라마의 세령공주와 너무도 꼭 닮았는바 그 어린아이에게

물어서 그 어린 계집아이의 집을 찾아 갔더니 바로 그 어린 소녀의 어머니가

공주였다고 되어있다. 어찌되었든.......

 

세조가 지나다 보니 웬 아낙이 길가에 엎드려 구슬피 우는지라 가마-왕의 행차-

를 멈추어 가까이 불러 그 연유를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놀랍게도 그 아낙은

수십년 전 자신이 죽이려했던 그 공주임을 확인하게 되었다. 세월이 흐르는

동안 자신의 지난 과오를 깨닫게 되었던 세조는 늘 공주의 지난 일이 마음에

걸렸는데 이렇게 만나게 되니 몹시 기뻐하며 공주의 결혼생활을 허락하였다.

이렇게 해서 김종서의 후손이 끊기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물론 그 뒤에 세조가

다시 한양에 데려와 살게 하려고 사람을 보냈는데 그들은 이미 그 곳을 피해서

간 곳을 모르게 되었다고 한다. 옥양석고 밑을 흘러 이루어진 옥양폭포를 앞에

두고, 천장절벽이 만든 보굴은 그 당시 공주부부가 명명한 것이라고 전해진다.


 노래 -조수미- 가고파

 

 
출처 : 演好마을
글쓴이 : 설봉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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