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신들린 아들의 아버지가 예수께 대답하기를 "내가 믿습니다"라고 획신있는 말을 해놓고 곧 이어서 "믿음 없는 나를 도와주십시오"(막 9:24)라고 신앙 없음을 고백했다.
신앙이란 신앙 없음을 발견하는 것이란 말인가? 신앙의 이같은 역설적인 성격에 대응하고 있는 것이다. 신앙의 역설적인 성격은 '신앙과 실감'이라는 주제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교인 가운데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머리로 납득이 가나 가슴에 하나님이 실감되지 않는다고 고백하는 사람이 있다. 신앙은 실감되는 것일까? 신앙이 실감되는 것이라면 그것은 이미 신앙이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신앙이란 실감되지 않는 것을 믿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오늘은 춥다' 라는 실감은 피부감각이어서 피부감각을 믿을 필요는 없다. 즉 "오늘은 춥다고 믿는다" 라는 식으로 말할 필요는 없다.
그와 같이 인간이 하나님의 품 속에 안기워 있는 것이 피부적으로 실감된다면 그때는 신앙이란 필요 없게 된다. "내가 믿습니다." 란 말은 "믿음 없는 나" 이기 때문에 고백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거기에는 역설적 양면이 있다. 과연 신앙은 실감 되지 않는 내용일까? 언제까지나 실감할 수 없는 신앙은 소위 '머리에만 있는 신앙', 즉 관념적인 신앙은 어떤 의미에서는 실감되는 것이 아니면 안 된다. "믿음 없는 나를 도와주십시오." 라고 고백할 때는 이미 신앙이 실감되어 있는 상태이다.
"목사님은 하나님의 사랑을 인격적으로 실감할 수 있습니까?" 라고 안타깝게 묻는 젊은이들에게 나는 하나님을 찾는 방향을 고쳐보라고 권하고 싶다.
하나님을 붇들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실감할 수 없는 사람은 방향을 바꾸어 사람을 죽도록 사랑해 보라고 권하고 싶다.
자기의 목숨을 바칠 만큼 사람을 사랑해 보면, 사랑에는 고뇌가 뒤따른다는 진리를 실감해 보면, 자신이 얼마나 이기적이고 윤리적으로 무능한가를 절감해 보면, 그때 하나님의 사랑은 이러한 것이라고 비로소 알게 되고 하나님의 존재를 비로소 실감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