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의 카테고리
炚土 김인선
축복받은 이 푸른 행성에 사는 우리는 수많은 소리의 파장에 쌓여 살고 있다
바람과 나뭇잎의 속삭임 소리부터 맑은 개울물 소리와 새들의 노랫소리
천둥과 폭우의 소리 등 자연 속에서 들려 오는 온갖 소리는 흉내 낼 수 없는
고유의 진폭과 진동을 지니고 있다
산사의 처마 밑 풍경소리는 얼마나 청아하며 성당의 종소리는 얼마나 성스러운가
자연과 달리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소리가 아름답게 함께 하는 이곳
눈 만 뜨면 들려오는 소리 속에서 우리는 좋아하는 소리를 찾아 나선다
50년여 전 내가 살던 인천의 동구 송림동 산비탈 판자촌 골목의 아침은
두부장수의 종소리와 판자 담장 옆으로 작은 개울 된 하수도를 따라
하얀 비누 거품 물이 흐르는 소리로 시작되었다
집집이 굴뚝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아침밥을 먹기 위해 군데군데 옻칠이 벗겨진
커다란 두리반에 온 가족이 둘러앉을 시간이면 여지없이 마당 뒷켠
변소간 옆에 묶인 누렁이의 사나운 짖음이 들리고
성긴 나무 대문을 흔들며 '밥 좀 주쇼'하는 구성진 목소리가 함께 들려온다
밥 깡통을 두드리는 숟가락의 째질듯한 파열음은
그 시절 아침마다 들어야 했던 슬픈 소리였고
부엌에서 나온 어머니는 드문드문 쌀알이 섞인 보리밥 한 주발에
김치 한 덩이를 얹어 밥 동냥하는 거지의 깡통에 담아주며
항상 혀를 차며 '꼭 덥혀 먹어'하며 걱정스러운 말을 했다
무더운 여름에는 단물에 색소만 넣고 가느다란 막대기를 끼워 얼린
아이스케이크를 파는 장사가 큰 한길 가부터 '아이스께끼 얼음과자 '라고 소리치면서
묵직한 아이스케이크 통을 어깨에 메고 동네 골목길로 들어서면 서둘러 모아 두었던
4홉들이 소주병과 헌 책 그리고 찌그러진 냄비와 찢긴 어머니의 고무신을 들고
아이들이 우르르 아이스께끼 통을 둘러쌌다
까맣게 탄 얼굴에 땀 흘리며 뱉어내던 구성진 '아이스께끼'란 소리는
단물이 줄줄 흐르는 소리였다
추운 겨울 함박눈 소복이 내리는 밤, 자정 무렵이 되면 통행금지를 알리는
야경꾼의 딱딱이 소리가 '딱딱' 고요한 정적을 깨고 메아리 되어
꿈결 속으로 빨려들어 와 하루가 지나갔고
멀리 사라지던 딱딱이 소리는 긴긴 겨울밤의 포근한 자장가 소리였다
전후 폐허 속에서 가난을 극복하려는 경제 정책으로 수출 공단이 들어서면서
가발이 수출 상품으로 인기를 끌자
골목엔 '머리카락 삽니다, 은이나 금 사요'라는 소리가 종종 들렸고
그 소리는 우리의 어머니가 한 자루의 밀가루를 사기 위해
곱게 기르던 머리카락을 싹둑 잘라 팔았던 애틋함이 물씬 밴 소리였다
동네마다 재래식 화장실을 퍼내야 했던 탓에 '똥 퍼'라고
똥지게 진 청소부의 걸걸한 소리는
곰삭은 된장 항아리 뚜껑을 열어 보았던 때 나든 고운 향기 밴 소리였고
골목 어귀 빈터에서 '뻥 이요'이요 하며 옥수수와 보리를 튀기던
뻥튀기 기계의 커다란 소리는 함박웃음 짓던 고소한 소리였다
잊힌 소리, 지금은 들을 수 없는 애잔하게 가슴 저미던 소리가 기억에 생생하다
그러나 그중에서 한평생 못잊으며 아직도 가슴이 울렁이는 벅찬 소리가 있다
미군 부대에서 실직당한 아버지가 생계를 위해 노동판에 나가 일하던 때
여명이 채 스미지도 않은 꼭두새벽에 일터로 나가려 옷을 챙겨 입고
방 한쪽에 어미가 차린 새벽 밥상에서 아버지가 밥 먹던 소리이다
찬 새벽녘에 식었던 구들장이 어머니가 새로 넣은 장작에 따스한 온기가 퍼지면
웅크렸던 허리를 다시 펴고 누웠던 아늑한 이불 속에서
아버지의 입으로 보리밥 한 숟가락이 드나들 때마다 어금니에 부딪혀 나던 소리
선잠 깬 뇌에 선명하게 새겨진 그 맑은 금속성 소리는 결코 잊을 수 없다
흡사 소리가 눈물을 흘리는 것 같았다
소리가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본 적 있는가
놋쇠 숟가락은 울고, 어금니는 눈물을 흘리는 듯
너무나도 아름다운 소리였다
아비는 그 어금니가 하나 둘 빠지자 한 잔 술에 애절하게 넘기던 창부타령마저 끊었다
이렇듯 지금은 영원히 듣지 못할 사라져 버린 소리가 문득문득 떠오르는 것은
바쁜 삶을 보내고 황혼의 이르러 잠시 여백이 주는 고독함이 추억을 불러내고
기쁨과 눈물 얼룩진 지난 시절에 대한 그리움이 솟구치는 탓이리라
아침마다 TV의 소리로 시작하여 질주하는 차량의 소리, 공사장의 소리, 등
온갖 소음에 무감각해진 청각이 그 그리움의 소리를 듣고 싶어
먼 어린 시절 속으로 고막을 연다
들을 수 없는 진정한 생의 소리를 듣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가끔 조용히 눈 감고 나는 그 소리의 조각을 찾아간다
본능의 나침반에 고정된 실낱같은 노스탤지어의 바늘이 가리키는 행복한 곳으로
낡은 창마다 불빛 정겹게 비치고 작은 돌부리 옹기종기 튀어 오른
단단한 흙바닥 길 낮에 날린 종이비행기가 다시 날고 싶어 버석거리는
막다른 작은 골목길에 기억의 뿌리를 뻗는다
서로 마주 보며 정겹게 선 나란한 판자벽에 두근대는 가슴으로 그린
옆집 순이의 얼굴에 초승달 빛 어스름하게 어리는 밤
아무도 몰래 '순이는 철수 좋아해'라고 시침 떼며 써 놓고
살 비듬이 얼어 붉어진 뺨을 나무라듯 때리는
한겨울 찬바람의 손바닥을 피해 도망치듯 빠져나오던 곳
밤이면 토막 난 은하수에서 반짝이는 작은 별들이 새파랗게 내려와
지붕 처마 사이에 다리 놓으면 깔깔거리는 순이 웃음이 창가 굴뚝 따라나와
별 다리를 밟고 우리 집의 가는 창살을 두드리며 네가 썼지, 하며 소리치는 것 같아
가슴 철렁했던 참으로 아름다운 곳
아늑했던 그 시간
몽롱한 새벽 같은 황혼
짙은 안개가 덮쳐 남은 기억이 사라지기 전에
그 행복의 나라로 가야 되지 않겠나
살아 있는 것들의 소리
그 파장 속
진한 울음이 있다
차가운 새벽달을 창에 걸고
야윈 볼 속
성긴 보리밥 한술 넣는
색바랜 놋쇠 숟가락
선잠 이불 속으로 생생하게 들리던
울음 같은
어금니의 맑은 소리
저절로 눈물 차오르는 아비의 생
그 처절한 여운
삶의 몸부림이여
혼의 소리여
어디까지 퍼져가고 있는가
- 졸시 '소리가 흘리는 눈물' 전문-
'시와 문학이 있는곳'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현대시100년] [영상기획(78)]일찌기 나는- 최승자 (0) | 2013.02.23 |
---|---|
[스크랩] 봄 (0) | 2013.02.22 |
[스크랩] 우리는 悲戀의 戀人 (0) | 2013.02.21 |
[스크랩] [현대시100년] [영상기획(76)] 조국 (祖國)-정완영 (0) | 2013.02.21 |
[스크랩] 잎새의 향기 (0) | 2013.02.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