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님이 다니시던 La성당 지지금은 La. 훠 리스트 론 공원묘지에. 아버님과 같이... 막내인 조희정이 지극 정성으로 묘비에 꽃과 기름칠을...
어머니는 개성 호수돈 고녀 출신의 그 당시는 꽤 인테리 셨다. 언제나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삶의 모범을 보여 주셨다.
우리는 1951 1.4 후퇴 당시... 8남매, 나는 연년생의 위로 셋째<11살> 였다. 내리는 날 아침, 눈에 톱밥 같은 것이 묻은 철모를 뒤집어 쓴 검둥이가 장총<M1>을 가지고 대문 쪽을 가리키며 고고<Go,Go>....
'그당시 아버지는 지식인이라고 일찌감치 제주도로 소개되어 연락이 끊겼었다.' 비교적 부유하고 평화롭던 우리집의 失鄕 역사는 이렇게 시작이 되었다.
피난 길의 가슴 아픈 역사는 많지만, 그때의 고생은 누구나 다 하는 것... 접 어 두 자...
나는 어머니로부터 이런 것을 배웠다. 1. 어머니는 늘 설날, 잔치등에는 어려운 사람, 거지들에게 술 한잔과 음식을 개다리소반에 차려 베푸셨다. 그냥 던저? 주는것이 아니셨다. 나중에 듣고 보니 이유는 이랬다.
우리집 식모였던 '상순'이가 어머님 밑에서 살림을 잘 배웠다고 소문이나 동네 말썽꾸러기였던 어느 머슴에게 시집을 갔다. '오래 데리고 있어서' 어머니가 섭섭치 않게 잘<셋방 얻어> 해 주셨다고 한다.
좀 있어 6.25가 일어 났는데, 머슴이었던 그의 남편이 인민위원장이 된 것이다. 많은 지식인들이 고초를 당하거나 죽임을 당했는데 상순이가 미리 연락을 주어 우리 아버지는 그 禍를 면할 수가 있었다. 善?에 대한 보답?인 것이다.ㅎㅎㅎ
더욱 고마운것은... 맥아더 장군의 인천 상륙작전 성공으로 9월 28일 서울이 수복되고, 인민군들과 부역자들이 北으로 후퇴 당시였는데...하루 전날 상순이가 밤에 급히 달려와, '빨리 어르신 산으로 도망 시키세요. 오늘밤 다 죽인데요' 하는것이 아닌가??? 아버님은 허겁 지겁 산으로 피신, 3일 후에 내려 오셔서 또 禍를 면했다. 이게 다 어머님의 훌륭하고 현명하신 德이 아닌가 생각 된다.
어머님은 그때 상순이에게 '이 자전거<일제 미아다> 끌고 가, 남편이 北으로 가게 되거든, 타고 가라'하고 주셨다는 것이다. 그 자전거는 아버님이 제일 아끼시던 것이었으며, 재산 목록 1호였다고 하셨다. 나중에 동네 사람들한테 들으니 그 인민위원장이 장총<따꽁총>을 신문지로 둘둘 말아 자전거 안장 사이에 묶고는 어딘가로 사라졌다는 것이다. 이렇게 어머니는 그 대가?를 꼭 갚으신 분이셨다. '이는 내가 직접 목격한 사실이다.'
2. 우리는 많은 어려움을 겪으신 어머니로부터 다음과 같은 절략을 몸에 익혔다. La에서 生을 마감하신 어머님은 늘,
가. '他에는 寬大 하되, 自에는 嚴하라' 하셨고.. 나. '어려운 사람들을 잘 보살 펴라, 세상이 어떻게 뒤집힐 줄 모른다' 하시던 말씀... 다. 어머님은 명절날이나 잔칫날, 동네 거지들을 모아 술과 밥을 한상 차려 주셨다.<옛날> 라. 어머님은 평생 파마머리나 긴머리, 비녀를 꼽으신 일이 없다, 사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컷트 머리 셨다.<그당시 인데도...> 마. 화장실에서 글을 읽기전에는 불을 켜는 일이 없으셨다. '좀 있으면 환해지는 데, 왜 불을 켜느냐'고 하시며... 바. 어머님은 당신을 위해서 쓰시는 것을 극히 절제 하셨다. 그러나 남편, 자식, 남을 위해서는 생대적으로 寬大 하셨다. 사. 변기 물통에는 늘 벽돌 두개를 넣어 두셨다.<물 절략> 아. 밥은 늘 우리들이 먹고 남은 반찬들을 큰 그릇에 담아 참기름 한방울 넣고 비벼 잡수셨다.<이제야 그뜻을...> 자. 어쩌다 동태 등, 생선국을 먹노라면 어머님것이 제일 많았다. 알고 보니 대가리와 꼬리 부분이었다. 차. 우리 형제들은 바지에 주머니가 없다. 남자가 손 넣고 다닌다고 모두 꿰매 버리신 것이다.<넘어지면 다친다고> 카, 돼지 도리 하는 날, 비개 한덩어리 짚에 매어, 소주 한병 치마폭에 감춰 오셔서... 8남매가 다 잠든 밤에 삶아, 아버지를 뒤곁으로 불러 내시어 간단한 주안상을 베푸셨던 어머님이 생각난다.
Ps; 나는 어머님을 따라 가려면 한참 멀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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