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랑 끝입니다, 날게 하소서
벼랑 끝에서 새해 아침을 맞이합니다.
우리에게 날 수 있는 날개를 주소서.
어떻게 여기까지 온 사람들입니까.
험한 기아의 고개에서도
부모님의 손을 뿌리친 적 없고
아무리 무서운 전란의 들판이라도
등에 업은 자식을 내려놓은 적 없었습니다.
남들이 앉아 있을 때 걷고
그들이 걸으면 우리는 뛰었습니다.
숨 가쁘게 달려와 이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눈앞인데
이 낭떠러지에서 그대로 떨어지라 하십니까.
벼랑이 벼랑인 줄도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어쩌다가 "북한이 핵을 만들어도 놀라지 않고,
수출을 몇 천억 달러를 해도
웃지 않는 사람들" 이 되고 말았습니까.
거짓 선지자들을 믿은 죄입니까.
남의 눈치 보다 길을 잘못 든 탓입니까.
정치의 기둥이 조금만 더 쏠려도,
시장경제의 지붕에 구멍 하나 더 나도,
법과 안보의 울타리보다 철없는 자의 키가
한 치만 더 높아져도
그때는 천인단애의 헛발을 내딛는 추락입니다.
덕담이 아니라 날개를 주십시오
비상非常에는 비상飛翔을 해야 합니다.
독기 서린 정치인들에는 비둘기의 날개를
주시고
살기에 지친 시민들에는 독수리의 날개를
주십시오
주눅 든 기업인들에는 갈매기의 비행을 가르쳐
주시고
진흙바닥에 처박힌 지식인들에는 구름보다
높이 나는
종달새의 날개를 보여주소서.
날게 하소서, 뒤처진 자에게는 제비의 날개를,
설빔을 마련하지 못한 사람에게는 화려한 공작의
날개를,
홀로 사는 노인에게는 천 년 학의 날개를 주소서.
그리고 남남처럼 되어가는 가족에는
원앙새의 깃털을 내려주소서.
우리 어린 것들이 다니는 학교 마당에도 황혼이
지고 있습니다.
더 어둡기 전에 미네르바의 부엉이처럼 날개를
펴게 하시고
갈등과 무질서로 더 이상 이 사회가 찢기기 전에
기러기처럼 나는 법을 가르쳐 주소서
소리를 내어 서로를 격려하고
선두의 자리를 바꾸어 가며 대열을 이끌어간다는
저 신비하고 오묘한 기러기처럼
우리 모두를 날게 하소서
아닙니다. 아주 작은 날개라도 좋습니다.
"날자 날자 한 번만 다시 날아 보자꾸나."
지금 외치는 이들 소원을 들어주소서.
은빛 날개를 펴고 새해의 눈부신 하늘로 날아
오르는
경쾌한 비상의 시작!!
벼랑 끝에서 날게 하소서.
<중앙일보 신년호에 게재된 신춘서,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