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났다. 외가가 대대로 화원을 배출한 미술가 집안이었기에
어려서부터 그림에 뛰어났고,일곱살에 도화서 김응환의 제자가 됐다.
김응환은 당시 유명한 문인 화가인 강세황에게 김홍도를
소개했으며,도화서에 정식으로 들어간 김홍도는 1771년
왕세손인 이산의 초상화를 그릴 만큼 화원으로 재능을 인정받았다.
1776년 영조에 이어 이산이 정조로 보위에 오르자,
김홍도는 규장각도를 바쳤고,1781년 정조의 초상화를 그렸다.
정조는 "그림과 관계된 일이면 모두 홍도에게 하게 하라"라고
할 정도로 김홍도를 총애했다.김홍도는 성품 또한 '군선도'를
그린 것처럼 호방하고 신선과 같은 풍류를 즐기며 살았다고 전해진다.
조희룡이 쓴 '호산외사'에 따르면 김홍도는 말년 너무 가난해
조석으로 끼니조차 잇기 어려웠지만 시장에서 본 매화를 보고
사고 싶어 자기 그림을 3000냥에 팔아 2000냥으로 매화를 샀으며,
나머지 돈으로 지인을 초대해 술잔치를 벌였다.
김홍도는 김응환과 함께 1788년 금강산 산수화를,
1789년 일본 지도를 그려오라는 어명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1789년 김응환이 부산에서 병으로 죽자 홀로
대마도로 가서 일본의 지도를 모사해 돌아왔다.
1790년에는 사도세자를 위해 지은 사찰인 용주사 대웅전에
삼세여래후불탱화를 그렸으며
1795년 충청도 연풍에서 현감으로 임명되기도 했다.
김홍도는 소금 장수로 부를 축적한 거상 김현태에게 그림을
그려주는 대신 경제적 지원을 받아 활발히 그림 활동을 할 수 있었지만
말년에 생활이 어려웠다.1805년 병으로 위독했다는 기록이 있으나,
정확한 사망 연도는 알려지지 않았다.
신윤복은 화원 가문인 신한평의 장남으로 1758년 태어났다.
도화서 화원으로 벼슬이 첨절제사에 이르렀으나 속화(俗畵)를 즐겨
그려 후에 쫓겨났다는 이야기만 전해질 뿐 개인적인 생애와
사망 시기에 대해서는 기록이 전무하다.
다만 권력과 조정의 그늘에서 벗어나 살았으며,
유교 사회로부터도 소외당했다고 보는 학자들도 많다.
신윤복은 기생과 한량, 별감이나 포졸 등 하급 잡직 관료들의 모습을
그렸으며, 봉건 사회와의 갈등 속에서 자신만의 예술 세계를 고집했고
대부분의 작품에 짤막한 찬문(贊文)을 담아 감각적인 글솜씨도 발휘했다.
'기방무사' '월하정인' '혜원전신도' 등이 대표작이며 그림 속에
자주 자신을 등장시켰다는 학설도 있다.그림 인물 중, 주변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는 이가 바로 신윤복 자신이며,이는 장난기 섞인
에로티시즘이자 세상을 관조하는 풍자적인 의미라고 학자들은 주장한다.'
처네를 쓴 여인'이 1829년 그린 작품이라,
19세기 초까지 활동한 것으로 짐작된다
잘 사용되지 않았던 화려한 색을 주로 사용하여
선정적이면서 은근한 노골적 표현이 돋보인다.
성적인 남녀의 표현이 전부가 아니라 권력의 부조리나 윤리관에 대한
비판의식이 담겨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대표작인
〈미인도〉<단오도> 을 봐도 그가 표현하는 작품의 색깔을 느낄 수 있다.
미인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