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나무 기개(氣槪)서린 덕봉리 선비마을
-나라와 고장을 빛낸 인걸과 여인들-
淸嵐 黃 晋 燮(수필가)
1.덕봉리의 면모
봄날의 양광을 온몸으로 받으면서 안성선비마을을 찾았다.
이곳은 안성시 양성면 덕봉리, 문화체육관광부가 선정한 경기도의 유일한 선비마을이다.
海州吳氏 貞武公派 집성촌인 덕봉리 선비마을은 500여 년의 유구한 역사와 전통이 면면히 이어지고 있으며 유교문화와 선비정신의 보고로서 그 면목을 자랑하고 있다.
선비는 신분으로서의 위계라는 개념 보다는 인격으로서의 절의(節義)와 지조(志操)라는 측면이 훨씬 뚜렷이 부각되고 있다.
유교가 국가통치 이념이던 구시대가 지나고, 근대적 시민사회에 들어선 오늘에 있어서도 성숙된 시민정신의 함양과 지도계층에 요구되는 높은 수준의 도덕적 의무감, 다시 말하면 노블레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를 확립시키기 위해서도 선비정신은 더욱 강조되어 마땅하다고 하겠다.
선비마을을 찾은 것도 점차 도덕적으로 퇴락을 거듭하는 우리 사회의 정화에 대한 욕구와 기대에 무관하지 않다.
이 동리에는 누대에 걸친 인재의 산실이었던 貞武公 吳定邦 장군의 고택 退全堂과, 높은 벼슬에 연연하지 않고 정의를 위하여 절의를 굽히지 않았던 陽谷 吳斗寅 忠貞公을 배향하는 德峰書院이 있다. 그리고 동리 뒷산에는 12세(世) 吳慶雲공 부처를 비롯하여 동리와 씨족을 빛낸 명사들의 묘역인 지청방이 잘 조성되어 있다.
조선조 덕봉리 출신 인맥을 살펴보면, 과거 급제가 문무를 통 털어 무려 137명에 이르는데, 문과급제가 20명, 무과급제가 117명이다. 과거를 통하지 않고 음사(蔭仕)로 관직에 나간 사람은 148명이나 된다. 임금이나 나라에 대한 공덕으로 시호를 받은 이가 9명이고, 그 밖에도 충신과 공신 각 1명에 효자와 열녀 정려(旌閭)를 받은 사람들이 여럿이다.
안성 선비마을 답사를 위하여 사전에 자료를 챙겨보면서 맥맥히 이어 내려온 이 마을의 빛나는 인맥에 놀랐다. 전국을 통 털어 한 마을에서 이렇게 많은 인재가 배출된 곳은 아마도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다.
덕봉리 선비마을에서는 수많은 선비, 즉 그 시대의 인재들이 배출되어 그 당시 국가의 유지와 발전에 공헌하였다.
어느 시대 어떤 사회를 막론하고 걸출한 인걸의 출현과 역사의 진운에는 그 막후에 여인들의 입김과 영향이 컸음은 동서고금을 통하여 다를 바가 없다. 다만 우리나라에 있어서 전통적인 남존여비 풍조의 영향으로 기록되지 않고 드러나지 않았을 뿐, 여인들의 역할은 결코 작은 것이 아니었다.
때로는 피눈물 나는 인고와, 때로는 따뜻한 숨결이, 기록된 남성들을 키우고 북돋아 왔음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곳 덕봉리에서도 인걸의 배출과 선비정신의 계승에 굽이굽이마다 여인들의 숨결이 마치 지열처럼 끊이지 않고 이어져 왔다.
먼저, 해주오씨 집성촌 형성과 선비마을로서 빛나는 명성을 누리게한 한 여인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본다.
2. 심씨부인 이야기
사백구십 여 년 전, 집성촌 형성당시의 沈씨 부인에 관한 이야기이다.
관향이 풍산인 沈氏 부인은 해주 오씨 11世 吳賢卿의 며느님이었고, 그의 둘째 아들 慶雲의 아내였다.
1525년(중종20) 3월14일, 전 내금위(왕의 호위군대) 柳世昌과 그의 동생 世榮형제가 경복궁 영추문(迎秋門)에 와서 역모사실에 관한 모함과 허위보고를 하였다. 이 사건은 柳世昌의 공명심에 의한 것으로, 있지도 않은 사실을 고하여 자기의 공로를 인정받기 위한 것이었다.
평소에 같이 술 마시고 놀던 친구들을 꾀어 몰래 이들의 성명을 기록한 문서를 만들고 마치 역모를 계획한 것처럼 꾸며 보고를 하였다.
의금부에서 연루자들을 잡아 문초하였는데 해당자들이 모두 부인하고 증거도 없었으나 다만 종이에 적힌 명단이 옷깃에서 나왔기 때문에 이것을 근거로 자복시키고 가혹한 형벌을 가하였던 것이다.
허위 역모사건의 조사는 오씨 문중에 비화 되어 멸문의 위기를 당하게 되었다. 吳賢卿의 동생 弼卿과 壽卿은 처형되었고, 賢卿의 장남 慶星은 도피하여 화를 면했으나 그 자손들은 숨어서 천대를 받으며 살아갔다.
吳賢卿은 문중의 불상사를 책임지는 처지가 되어 경상도 산음(경남 산청군)으로, 둘째아들 慶雲은 역시 경상도 안음(경남 함양군 안의면)으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 거리도 멀거니와 첩첩 산중 지리산 자락이었다.
吳賢卿 부자는 각기 유배지에서 날조된 음모가 밝혀져 누명을 벋게 될 날을 기다리면서 온갖 어려움을 겪었고 한 많은 나달을 보내던 중, 부친 賢卿은 그해 섣달 열이렛날, 아들 慶雲은 닷새 후인 스무 이튿날 각각 세상을 떠났다. 천리 밖 귀양지에서 시아버지와 남편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인편으로 전해들은 심씨 부인은 억장이 무너졌다.
그때 吳慶雲과 심씨부인 사이에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형 壽千은 아홉 살, 동생 壽億은 일곱 살이었다. 어린 두 아들을 데리고 살을 에는 엄동에 천리 길을 걸어서 산음과 안음으로 가 시신을 수습하여 덕봉리 친정으로 모셔 왔다. 그러나 장지를 마련하지 못하여 애를 태우고 있던 중에, 문밖에 동냥을 하러온 낯선 스님이 목탁을 치며 염불을 하고 있었다.
沈氏 부인이 집안의 변고와 딱한 사정을 이야기 하였더니, 스님은 고맙게도 묘지를 지정해 주는 것이었다. 시아버지는 동리 뒤 천덕산에서 동쪽으로 내려오는 산마루 넘어 쇠꼴, 금관옥대형(金冠玉帶形) 자리에, 남편은 고성산 남쪽 아래 능선에, 스님이 알려준 대로 장사를 지냈다.
그로부터 오래지 않아 시아버지와 남편은 무혐의가 밝혀져 복권 되었으나 이미 세상을 떠난 이 들에게 천추의 한이 남을 따름이었다.
그 얼마 후, 시어머니 안동 권씨가 돌아가셨는데, 또 우연히 지난번 그 스님을 만나게 되었다.
시아버지와 남편 산소 자리를 잡아준 것에 감사하면서, 다시 시어머니 묘 터를 봐 줄 것을 부탁하였더니, 스님은 거침없이 ‘여기서 15리 남쪽으로 내려가면 거지들이 움막을 치고 사는 곳이 있는데, 움막을 다른 곳으로 옮겨주고 그 자리에 모시도록 하시오. 그 자리가 화심혈(火心穴)의 명당 터요.’하고 일러 주는 것이다. 그대로 묘를 썼는데 그 곳이 바로 공도읍 신두리로 지금도 그 산소에는 꽃술을 다칠까 사초는 하지 않고 보토만 하고 있다고 한다.
심씨 부인은 친정집 낡은 옛 집에서 두 아들을 데리고 가난에 시달리면서 어렵게 살았으나, 부덕(婦德)을 지켜가며 법도로 아이들을 철저히 교육시켰다. 집안에서는 효도하고, 나가서는 나라에 충성하며, 붕우 간에 신의를 지킬 것을 가르쳤다. 말하자면, 忠과 孝와 信義가 가풍이요, 교육의 지표였다.
부인은 집안에 변고가 있고 난 후 44년을 더 살다가 1568년(선조1년)에 세상을 떠났다. 부인은 가셨지만 그 아들들은 큰 인물이 되어 나라에 충성하고 가문을 빛내게 된다. 큰 아들 壽千은 西班 정삼품 당하관으로 어모장군, 충무위 부호군을 역임하고 호조판서에 추증되었다. 둘째 아들 壽億은 무과에 급제하였고, 역시 어모장군, 경상좌도 수군우후를 지낸 다음 병조판서에 추증되었다.
3. 人脈의 産室 退全堂과 德峰書院
심씨 부인의 손자 대에 출중한 인물이 나니, 그분이 바로 退全堂 吳定邦 貞武公으로 덕봉리 해주 오씨 貞武公派의 중시조가 된다.
무과에 장원급제 하고 임진왜란 때 수훈을 세웠으며, 의주로 몽진하는 선조를 안전하게 모신 공로로 호성공신이 되었다. 전라도, 경상 우 좌도, 황해도의 병마절도사를 지내고 포도대장에 올랐으며 사후에는 병조판서로 추증되었다. 吳定邦 장군 때부터 덕봉리의 중흥기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退全堂의 당호를 따 지은 한옥의 건립연대는 약 500여 년 전으로, 그간 수차에 걸쳐 전면적인 보수가 있었다. 현재는 독특한 기억자(ㄱ)자 형태의 사랑채 겸 안채가 원형을 보전하고 있으며, 뒤편으로 단아한 사당이 옛 명현들의 소박한 정을 그리며 서 있다. 이 한옥은 1510(중종5)년 동리 안 다른 위치에 세워져 있다가 1650(효종1)년, 현 위치로 이전 보축되었다고 하는데 해주 오씨 가문의 인걸들을 배출한 유서 깊은 곳이다.
이집의 역사를 묵묵히 보아온 고목이 집 앞에 서 있고 인걸들이 학문을 연마한 백련정(白蓮亭)과 물이끼 낀 연못이 남아 있어 이 고옥과 덕봉리의 빛나는 역사를 물 위에 비춰주고 있는 듯하다. 조선 중후기 지배계층의 주택면모가 잘 갖추어져 있어 당시의 건축 양식과 민속 연구에 소중한 자료가 된다. 陽谷 吳斗寅은 이 집에서 성장하여 나라에 크게 공훈을 떨친바 있어, 우암 송시열이 편액을 써서 보내오기도 했다 한다.
퇴전당 吳定邦의 네 손자 (䎘/나래숙, 賓+羽/나래빈, 翮/나래핵, 翔/나래상 /심씨 부인의 현손) 중, 셋이 문과에 급제하고 하나는 蔭仕로 관직에 진출하여 네분의 이름자인 나래의 뜻 그대로 관계와 학계에 훨훨 날아 그 명성을 빛내게 된다.
앞서 언급했듯이 吳定邦의 증손자 陽谷 吳斗寅(경상도 관찰사 吳䎘의 아들)은, 어릴 때부터 명석하였다. 1648년(인조26)진사시에 1등으로 합격하고 이듬해 별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한 吳斗寅은 여러 관직을 거쳐 경기도 관찰사를 지내고, 드디어 판서 직에 올라 공조판서와 형조판서를 역임하게 된다.
1680년(숙종6), 현종임금의 셋째 따님이고 숙종의 누이인 明安公主가 吳斗寅의 아들 泰周와 국혼(國婚)을 이루어 이 마을은 駙馬洞里가 되었다.
吳泰周는 海昌尉에 봉해지고 종1품 명덕대부에 올랐다. 明安公主가 이 동리에 와 살지는 않았지만 부마를 끔찍이 사랑하였다는 여러 일화를 남기고 있다. 泰周와 公主의 아들에 瑗이 있었고, 瑗은 아들 載純을 두었는데 父子가 각기 홍문관과 예문관 양관의 대제학을 역임하여 천하에 명망을 떨쳤다.
장희빈을 총애한 숙종은 1689년 중전 인현왕후 閔氏를 폐위하게 되는데, 吳斗寅은 이에 반대하는 소를 올렸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 국문 당하였다. 임금의 査丈이 되는 吳斗寅은 66세의 고령에 밤새도록 이어진 고문에도 당당하고 조용한 목소리로 논리를 전개하여 부당함을 주장하였다. 숙종은 査丈을 차마 극형에 처하지는 못하고 의주로 유배를 보내는데, 국문의 후유증으로 파주에서 생을 마치게 된다. 숙종은 곧 자기의 잘못을 뉘우치고 그해, 복관조치를 취하였다. 陽谷 吳斗寅에게 영의정이 추증되었고 그 시호가 忠貞이다.
忠貞公 吳斗寅의 충절과 정의감을 기리고 배향하기 위하여 士林들의 청원으로 1695(숙종21)년에 덕봉서원을 세우고 1700(숙종26)년에 ‘德峰祠宇’라는 사액이 내려졌다.
忠貞公 吳斗寅의 배향서원으로는, 坡州의 豊溪祠, 光州의 義烈祠, 義城의 忠烈祠, 함경도 北靑의 노덕서원이 있다. 덕봉서원은 이 여러 서원의 원조라고 할 수 있다. 후에 이 서원은 고종 8년(1871), 大院君의 전국에 걸친 서원철폐령(書院撤廢令)에도 불구하고 훼철(毁撤)되지않고 존속되고 있는 전국 47개 書院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이로 인해 양곡의 고향 덕봉리 선비마을은 전국적으로 명망이 높아졌다. 1972년 5월 4일, 덕봉서원은 경기도 地方有形文化財 第 8號로 지정되었다.
고성산 비로봉자락 남동쪽에 자리 잡고 있는 덕봉서원은, 우선 홍살문을 거쳐 외삼문으로 들어서면, 선비들이 공부하던 강당인 정의당이 있고, 내삼문으로 들어서면 약간 높은 곳에 제사지내는 사당이 배치되어 있다. 그리고 정의당 양편에는 연소한 선비들이 밤이 이슥하도록 과거준비를 하며 寄宿하던, 동재(東齋)와 서재(西齋)가 있다.
소장 전적과 유물로는 창건당시 숙종께서 하사하신 '덕봉사우(德峰祠宇)'라는 현판이 뚜렷한 형태로 걸려 있고, 陽谷 吳斗寅이 지은 『陽谷集』2券 4冊과, 숙종 7년(1681) 金昌協이 그린 陽谷의 肖像畵 한 점과 位牌가 奉安되어 있다. 문화재청 기록에 따르면, 1794년(정조 18)에 祠宇와 강당인 정의
당(正義堂)을 重建하였고, 1984년까지 몇 번 훼손되었던 書院을 중건하였지만 오늘날까지 당당한 모습으로 옛 배움터의 모습을 갖추고 있다.
돌이켜 보면, 덕봉리 집성촌의 형성과 중흥은 심씨 부인으로부터 비롯되었음을 잊을 수 없다. 한 여인의 인고와 절의는 이토록 빛나는 인맥을 형성한 뿌리가 된 것이다. 스님으로부터 묘지에 관한 계시를 받았다는 이야기는 어쩌면 뒷사람들이 꾸며낸 설화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설사 꾸며냈다고 하더라도 여인의 인고와 덕행으로 가문의 중흥을 이루었다는 이 얼마나 아름다운 설화인가. 지금도 “심씨 할머니”이야기는 이곳 덕봉리에서 역사와 설화로 널리 알려지고 있다고 한다.
많은 인재가 끊임없이 배출되어 덕봉리의 명성은 전국에 풍미하였다.
관찰사와 참판이 있었고 이조판서, 예조판서, 공조판서, 형조판서 등, 판서가 즐비하였으며, 학자와 승지도 있었다.
人傑은 한말까지 이어져 을사늑약과 경술국치에 즈음하여 관직에 나가 있던 이들이 직을 버리고 낙향하여 일제에 비협조, 반항생활을 했을 뿐 아니라, 3.1운동 때는 덕봉리 사람들이 선도하여 서부 안성지역에 2일간의 해방을 이루어 경기 남부지역 독립항쟁의 기폭제가 되었다. 대쪽 같은 선비정신의 발현이 아니던가.
4. 이완용의 누님과 김좌진의 부인
이 선비마을에 근세에 들어 입장과 처지가 서로 다른 두 여인의 실화가 전해져 온다. 놀랍게도 을사오적의 으뜸이요. 경술국치의 원흉인 만고의 역적 李完用의 누님 牛峰李氏 부인이 이 동리의 오득영과 혼인하여 왔다.
3.1운동 때, 양성, 원곡의 만세항쟁은 전국 3대 실력항쟁지로 알려질만큼 격렬하였는데 덕봉리 사람들이 양성의 만세항쟁을 주도하였으므로, 일본경찰과 군대가 들어와서 휘발유로 동리를 완전히 불태워 버린다고 위협하여 온 동리는 공포에 휩싸였다.
우봉 이씨 부인이 동생 李完用을 찾아가서 동리를 구해줄 것을 부탁하였는데, 묵묵부답으로 턱을 괴고 앉아있던 李完用이 이튿날 차를 타고 안성경찰서로 와서 서장을 만나고 돌아갔다. 그 후 만세항쟁 뒤처리가 완화되어 폐동의 위기를 모면하고 희생을 줄였다는 이야기가 이 동리 고령자들에게 전해 내려오고 있다. 마을회관에 들러 산수(傘壽)가 됨직한 어르신으로부터 들은 생생한 이야기다. 3.1운동 그 때로 부터 90여년이 지나간 오늘에, 이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묘한 갈등이 느껴진다. 그러나 우봉 이씨 부인의 덕봉리를 구해야 되겠다는 일념은 가상타 할 것이다.
또다른 여인의 이야기가 있다. 덕봉리 출신 吳淑根 여사는 청사에 빛나는 애국투사 金佐鎭 장군과 혼인하였다. 白冶 金佐鎭 장군은 청산리 대첩의 총사령관으로 일본군 3.300명을 섬멸하였고, 만주에서 전설적인 독립투쟁과 민족운동을 전개하였다. 국회의원을 역임한 金斗漢의 아버지이고, 현역 국회의원인 金乙東 의원의 할아버지시다. 金佐鎭 장군은 金斗漢을 호적에 입적시켰기 때문에 후사가 없었던 吳淑根여사는 金斗漢의 어머니가 되고, 金乙東 의원의 할머니가 된 셈이다.
吳淑根부인은 白冶將軍의 독립운동 뒷바라지를 하였고, 시어머니를 모시고 만주에서 살다가 서울로 돌아와 삼청동에 살았다. 金佐鎭 장군이 1930년 1월 24일 산시역 부근 정미소에서 고려공산청년회원 朴尙實의 흉탄에 쓰러졌다는 비보에 접하고 吳淑根여사는 다시 만주로 갔다.
암매장된 남편 유해를 밀감상자에 위장해 조국으로 모시고 들어와 白冶將軍의 고향인 충남홍성 서부면 이호리에 안장하였고, 金斗漢이 살았을 때 보령시 청소면 재정리 산에 묘역을 조성하여 이장하였다.
1957년, 세상을 떠난 선비마을의 딸 吳淑根은 남편의 유택에 합장되었고, 그가 태어나고 처녀 시절을 보냈던 덕봉리를 아련히 꿈꾸면서 잠들어 있다.
지금은 보령시에서 장군묘역으로 성역화 하였고 충남 기념물 73호로 지정되어 있다.
덕봉리 선비마을을 형성케 하고 빛낸 여인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유분방하고 개성적인 오늘의 여성들을 떠올려 보고 감회가 착잡하다.
안성 선비마을 덕봉리 역사상, 남성들이 학문과 관직에 나아가 선비정신을 계승하고 나라를 위해 큰일을 하였다. 이처럼 역사를 빛낸 훌륭한 인물 뒤에는 언제나 보이지 않는 여성의 손길이 있었다. 빛나는 기록의 흔적은 없지만 여성들은 남성을 낳고 길렀다. 때로는 엄격한 교훈으로, 때로는 따뜻한 모정으로 선비들을 키워냈다. 이 평범한 사실에서 우리는 다시 천착(穿鑿)하여 얻는 바가 있어야 할 것이다.
새삼 선비마을 인맥의 산실인 貞武公 오정방 古宅 退全堂과, 德峰書院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인걸은 가고 고색창연한 터전만 유물로 남아 있다.
지난 일을 돌이켜, 앞을 내다보는 온고지신(溫故知新)의 지혜는 옛사람의 교훈이 아니라 이 시대의 채찍질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선비마을을 조성하는 뜻이 거기 있을 듯싶다.
5. 고성산을 바라보며
마을 어른신의 긴 이야기를 생각하며 산세가 범상치 않은 고성산을 아스라이 바라보았다. 맥을 뻗어 마을의 내청용 내백호(內靑龍 內白虎), 외청용 외백호(外靑龍 外白虎)를 이루어 주고, 그 뒤에 호쾌하게 우뚝 솟아 있는 고성산은 역시 신령스러운 산이다. 둘러쳐진 소나무 숲은 독야청청한 선비들의 넋을 오늘에 되살리는 듯 하고, 향기로운 솔 내음은 살랑대는 봄바람을 타고 그윽하다. 두 줄기로 흐르다가 마을 한가운데에서 합수되어 한 줄기로 흘러내리는 물길이 정겹게 졸졸댄다. 마을 앞에 널따랗게 펼쳐진 들판에는 이앙기가 별로 요란하지 않은 발동기소리를 내면서 모내기가 한창이다.
넉넉한 논물을 가르면서... ('13.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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